“나를 믿고, 믿음대로 행동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는지. 각자는 유일하고, 특별하다. 자신의 생각에 맞춰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만이 참다운 인생을 살고 탁월한 성취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것, 이것이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명확한 자기인식에서 나온다. 명확한 자기 인식은 성숙함의 증거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완벽하게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즉, 성숙함은 늘 미성숙함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부모나 친척 혹은 스승이 나를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한 것에 따르며 성장해 왔다. 그러다 언젠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를 맞게 되는데, 그때가 비로소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모멘 텀을 갖는 순간이다. 이 모멘텀을 만드는 내적 힘이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자기대면에서 출발한다
탁월한 경영사상가인 피터 드러커를 통해 자신감을 이해해 보자.
1923년 11월 11일, 14살의 드러커는 중대한 경험을 한다. 이날은 드러커의 모국 오스트리아에서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수립된 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수도 빈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렸고 드러커는 빈의 제19지구 청년단의 선두에서 커다란 붉은 기를 들고 거리 행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참 행진을 하던 중 드러커는 자기 발 앞의 물웅덩이를 발견한다. 피하고 싶었지만 뒤에 있는 시위대에 밀려 발을 빠뜨리고 만다. 이 일이 일어난 직후 드러커는 깃발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대열을 이탈해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드러커는 대열에서 이탈하고 돌아온 자신의 행위를 깊게 고민했다. 웅덩이에 발이 빠져 구두가 더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아무 의심 없이 해온 일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것이었다. 드러커는 후일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을 걷게 될 운명이라는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 일이 있은 후 부모님과 나눈 대화에서 자신을 ‘구경 꾼’이었다고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 사회로부터 배우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신념을 쌓게 되는데, 소년 드러커는 대중들이 열광하고 또래 소년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거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해했다.
자신의 생각이 주류와 다를 때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순응 또는 동의가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듯 거부나 반대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 목소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드러커는 소년 시절 마음속 진실한 생각을 들었고 주류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인식했고 자신의 생각으로 삶을 열어가며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을 대면한 드러커는 이후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 곧 자신감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길을 걷게 된다.
드러커가 함부르크로 간 1927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나치 회의를 조직하고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프랑크푸르트 법대를 다니면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드러커는 히틀러와 그의 오른팔인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의 연설을 여러 번 듣고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현재 시점에서 나치는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악마 같은 세력으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정치 세력 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1918) 독일 경제는 급속히 몰락해 가고 있었고, 심각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나치는 패전, 실업, 불황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영웅을 기대했던 독일 대중의 절망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 결과 모순에 가득 찬 선전선동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결국 1933년 히틀러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드러커는 박사 학위를 받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임명직 강사직을 제안받았지만 히틀러 치하에서는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런던으로 떠난다. 드러커가 독일을 떠나게 된, 사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계기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서 시작되었다.
드러커는 나치가 적대시하는 보수주의 정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이는 곧 체포를 감수하는행위였다. 나치는 드러커를 체포하려고 했고, 체포를 불과 수일 앞두고 드러커는 독일 탈출에 성공한다.
청년 드러커는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위협에 굴복해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숨기는 행위는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표현의 자유라는 신념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두 가지 경험(혹은 사건)은 드러커라는 사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행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자신감 이다.
자신감, 자기존중, 자기인식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가치대로 삶을 영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이 말은 곧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존중에는 깊은 뜻이 있다. 존중은 타인을 향한 존중도 있지만 자신을 향한 존중도 있다. 사실,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더욱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세상에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부유함, 명예, 직위라는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고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의 삶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외부인이 보기에 그다지 아름답거나 행복하지 않은 삶 같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내면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좇아 무엇을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잘 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앞에서도 떳떳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무엇인가 보여 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진정한 존중이란 일종의 ‘책임’을 의미한다. 자신의 선택을 진정 존중하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임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의 뜻대로 하는 선택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나에게 필요한 선택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내가 누구인가를 나는 안다’라고 말했는데,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나의 선택과 행동이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온전히 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이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나는 무엇 이든 할 수 있어’와 같은 근거 없는 자기 과신이 아니며 ‘나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옳은 것이야’라는 자아 맹신도 아니다.
자신감은 자기 이해와 내면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시간이 필요하고 성숙한 이성이 필요하며 여러 번의 고뇌와 불확실함을 이겨내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런 것들을 건너뛰고 무조건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가장 중요하 다는 유아적인 요구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현대 심리학의 처방 중 하나인, ‘당신이 가장 소중 하다, 당신의 생각은 그래서 무조건 옳다’라는 주장은 진정한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신을 이해하고 내면에서 걸러진 가치와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감은 권리가 아니라 방황을 거친 믿음이다. 이때 믿음은 무조건적인 확신(내 마음속에 있으니 진리다)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심하면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받아들이는 진리를 뜻한다. 이런 자신감이야말로 진정한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결국, 자신감을 얻기 위해 서는 ‘내가 믿는 것’을 발견하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오직 자신 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할 때 비로소 성숙한 자기 발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 인식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인 동시에 살아갈 인생을 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바른 자기 인식 - 가치, 강점, 공헌
자기 인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가치, 나의 강점, 내가 할 수 있는 공헌을 생각해야 한다.
가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래서 가치는 살아가는 목적이고 삶에 의미를 주는 무엇이 다.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인생에서 목격하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나에게 생생한 무엇, 일생에 한번 진정으로 경험하고 싶은 무엇이 바로 가치다.
가치가 나에게 그리고 나의 삶에 왜 중요할까? 가치는 인생의 목적과 맥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일 가치가 없다면 인생은 그저 주어진 생명을 이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고귀한 어떤 것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파편에 불과하다.
드러커는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평생 희망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체주의라는 비극을 경험한 드러커에게 최소한의 인간성이 실현되는 정상적인 사회는 평생 동안 추구한 가치였다. 가치는 인생의 캔버스를 만들고 인생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정해준다.
강점은 내가 탁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엇으로 자질과 역량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만약, 스스로를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 현재 하는 일에서 만들어 내는 결과가 특별하지 않다면 하는 일이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일이거나, 강점을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분명하게 강점이 있다.
평생 39권의 책을 저술한 드러커는 10대 시절에 정치경제 에세이(수에즈 운하를 주제로 한)를 쓰면서 세상 일에 관해 글을 쓰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이후 저널리스트로 그리고 금융 회사 분석가로 일하면서 이 강점을 깊이 이해했고, 30대가 넘어 저술가이자 학자와 교수로서 유감없이 자신의 강점을 발휘했다. 이처럼 자신의 강점을 이해하는 것은 충실한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탁월한 성취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나의 강점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실용적 차원을 넘어선다. 어쩌면 자신의 생에 대한 책임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강점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붓과 물감과 같다.
공헌은 내가 세상에 주고 싶은 무엇이다. 이 말은 어떤 거창한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과 세상에 가치를 제공하는 결과를 말한다.
사회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기업에서 관리 업무를 하든 혹은 법률자문을 하든 혹은 첼로 연주를 하든, 공헌은 우리가 세상에 제공하는 가치이다. 오늘 내가 지하철로 출근했다면 지하철 역사를 만든 건축 회사(직원들), 지하철 차량을 만든 제조 회사(직원들), 그리고 차량을 운전한 기관사로부터 공헌을 받은 것이다. 근로자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무엇인 가를 생산하고 서비스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나 역시도 사회를 위해 공헌한 것이다.
공헌은 강점을 진정으로 활용한다.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보다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오직 강점을 바탕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2500여 년 전,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구두 수선공 중에서도 탁월한 구두 수선공이 있고, 의사 중에서도 탁월한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각자의 강점을 통해 탁월한 수준이라는 동일한 결과가 창출된다.
공헌에 대한 명료한 인식은 진정성 있는 노력을 하도록 동기를 제공해 준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보다 깊은 의미로 공헌을 생각할 때 우리의 동기는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진정성 있는 노력을 바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공헌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필자는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공헌은 누구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다양한 기회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드러커는 이에 대해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라고 조언했다. 이 질문에 드러커는 ‘목표 달성을 도와준 사람’으로 자신이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저명한 학자 혹은 훌륭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과 관계한 사람들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개인으로서, 조직과 공동체로서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일이 공헌이라고 믿었다.
요약하면 자기 인식은 가치, 강점, 공헌에 대한 나의 이해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이해해야만 나의 삶이 어떤 것이고, 무엇이 될 수 있으며, 살아갈 삶의 무대와 경계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선택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로운 사람일까? 결코 아니다. 따라서 자기 인식은 자유로운 삶, 충만한 삶을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에게 자신감이 있는가?
자신을 모른다면 결코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주도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가치와 희망, 강점과 약점, 사회에 바치고 싶은 공헌 등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이 책임에 응답하는 것이야 말로 소년에서 성인으로 경계를 넘는 첫 번째 숙제이다.
모든 영웅의 서사에는 역경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을 떠나 수많은 괴물과 싸웠다. 역경은 경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필수 장치다. 영웅은 역경에 맞서 도전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능력으로 경계를 넘는다.
인생을 함께하는 절대 불변의 존재는 누구일까?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나를 발견할 때 목적지를 바라보고 문지방을 넘어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자신감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격이다. 타인이 부여한 자신감이란 상대적일 뿐이고, 진짜는 자신이 부여할 때 만들어진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강점, 공헌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할 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부여할 수 있다.
자신감의 의미를 충분하게 생각하고 자신감에 따른 선택을 생각해 보자. 높은 자신감의 근거가 외부적인 것, 예를 들어 높은 보수나 타인의 인정 같은 거라면 지금의 자신감이 얼마나 오래갈지 생각해 보자. 반대로 자신감이 부족하다면, 그 이유가 외모, 집안 배경, 개성(소통에 서투름, 조용한 성격, 관계에 서투름 등)에 따른 것인지, 스스로 내리는 한계가 아닌지 생각해보자.
자신감을 바탕으로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하자. 진정한 자신감의 근거는 명확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한다. 바로 나의 소중한 가치, 강점, 공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탁월한 사람으로 자신감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스스로 자신을 믿어야만,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믿을 수 있을 때, 최선의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신감이 있는가? 다음 질문을 스스로 해 보기를 조언한다.
- 나는 자신감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가? 나 스스로 정직하게 부여하는 자신감인가? 그렇다면 근거는 무엇인가? 반대로 자신감이 부족하다면, 왜 그런 것인가?
-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으며 어떤 것에 강점이 있는가? 무엇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싶은가?
-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영역은 어디인가? 가정, 직장, 사회등 여러 영역에서 생각해 보자. 내가 실현하고 싶은 성취와 공헌은 어떤 것인가?
<문정엽 저, 탁월함에 이르는 피터드러커의 습관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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