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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드러커(Reading Drucker)

DRUCKER WEEKLY 10 정상적인 사회와 경영

by 문정엽/드러커연구가 2017.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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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CKER WEEKLY

피터 드러커로 경영과 세상 읽기

010/ 2017

 

 정상적인 사회와 경영

 

 

DRUCKER WEEKLY 010_2017_정상적인 사회와 경영.pdf



 



사회는 그것의 목적과 이상이 개인의 목적과 이상에 비추어 의미가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만일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없다면개인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 삶 사이에서는 명확한 기능적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왜냐하면 기능과 지위가 없는 개인에게 사회는 비합리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형태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뿌리가 없는 개인추방자에게-사회적 역할과 지위의 부재는 한 사람을 동료들이 있는 사회로부터 추방한다사회가 없는 것이다그는 악마적인 폭력만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반은 인식하지만 반은 무의미하며반은 빛 속에 반은 어둠 속에 있고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그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실제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채로 그의 삶과 생계를 결정한다그는 그가 규칙을 알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이상한 방에 있는 눈먼 사람과 같다.

 

(피터 드러커산업인의 미래, 1942)



사회에 대한 비전

 

지난해 10월부터 저는 대통령,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평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주제를 삶의 중요한 이슈로 안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게 직업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현장으로서 정치를 대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다는데요, 수십만이 사는 고대 그리스가 아니라 수천만이 모여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저는 몸으로 이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계기는 특정한 인물과 특정한 상황의 산물이지만, 바람직한 사회의 비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 머리로 새롭게 생각하는 경험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를 멈췄던 주제였습니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들 중에는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인공물이라는 뜻이죠. 사회 자체가 인간의 발명품입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기대와 판단은 인간에게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을 만든 인간의 기대가 담겨 있고 또한 만들어진 것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물은 진부해진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사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하고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람직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끊임없이 인간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왔고, 서로 다른 비전으로 인해, (때로는) 심각한 갈등과 희생을 겪었습니다.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비전으로서 민주주의 사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회에 대한 비전은 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이해되고 공감할 수 있는 명료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모든 인간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사회가 그런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비전은 완벽함에 대한 이상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과 인식능력을 넘어서는 사회는 불가능합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언제나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은 그 증거입니다. 완벽한 사회에 대한 꿈은 전체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지도자를 추종하게 되거나 이성을 넘어서는 광기가 사람들을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계몽주의가 종교라는 미신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자유롭게 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등장시킨 이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에는 전체주의의 씨앗이 담겨 있었습니다. 신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이성이 있고 이 이성에 따라 완벽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타협하지 않는(사실 타협할 수 없는) 절대주의가 내면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로베스 피에르라는 공포정치를 연 독재자가 루소를 주창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몽주의와 절대이성주의는 신에 의한 억압을 비판하는 올바른 역학을 했지만, 그 또한 인간의 절대성을 구현하는 누군가를, 체제를 상정했기 때문입니다


 

드러커의 비전: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

 

드러커는 현대 사회의 비전을 매우 명료하게 말했습니다. 드러커의 비전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입니다. 그를 경영학자로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드러커의 관심은 사실 사회에서 출발했습니다. 한 때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국이 수백만의 소국으로 무너져갔던 20세기 초중반 오스트리아에서 청년기를 보내고(보내야 했고), 히틀러에 의한 전체주의가 야기한 인류사의 유례없는 비극과 참상을 체험한 드러커로서는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러커는 사회를 한 사람의 개인의 관점에서 고찰합니다. 개인에게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제공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 개인으로서의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희망에 따라 바람직한 기여(물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그러한 삶이 존중 받고 가능한 사회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사회는 기능하는 사회이고, 그 기능은 사람에게 적절한 역할과 지위를 제공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기능은 다양한 기관(조직)에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그다지 큰 무게로 느껴지지 않지만(이미 조직들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이죠), 그가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불과 200여년전만 해도 인류가 살아가는 곳은 왕과 귀족, 집사, 대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수공업자가 사는 사회였습니다. 조직 사회는 인류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였습니다. 다양한 조직에 의해 생활이 이루어지고 조직을 통해 성장과 발전이 만들어 지는 현대 사회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다양한 기관(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사회,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증거입니다. 어느 한 사람, 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기관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다원성은 자유를 실현하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기관은 그 자체의 목적을 추구합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생계를 해결하고 보람을 얻습니다. 기관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만일 현대 사회에 기업이 없다면, 대학이 없다면, 병원이 없다면, 정부가 없다면 어떤 상황이 만들어 질 것인가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정상적인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조직의 역할이며 힘이며 공헌입니다.

 

드러커는 기능하는 사화의 비전을 다원화된 조직에서 찾았습니다. 저는 드러커가 말하는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사회는 완벽한 사회는 아니지만, 달리 말하면 낭만적인 희망이나 최고의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감안하면서 최소한으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사회입니다. 드러커는 이것을 견딜만한 사회라고 표현했죠. 조직이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이 안에서 사람들이 공헌을 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더욱 좋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는 인간이 품위와 자존감을 지키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사회입니다. 절대적인 자유와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과 같은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있고, 하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적절한 조직에서 적절한 지위와 역할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중감을 얻는 사회입니다.


 

경영, 기관, 사회

 

그런데, 기관이 명분만으로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인간의 몸에 있는 기관이 정상적으로 기능해야 인간이 생존하는 것처럼 기관은 정상적인 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기관이 병에 걸리고 장애를 안는 것처럼 기관도 병에 걸리고 장애를 겪습니다. 때로 기관은 불능 혹은 불임의 상태로 빠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한국 대학은 불임 상태에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사회를 운영하는 기관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따져 보고 혹 병에 걸려 있다면 고쳐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의 대척점은 전체주의입니다. 즉 병든 사회가 사망에 이른 것이 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회가 사람들의 신념을 지켜 주지 못하고 삶에 의미를 제공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절대적인 절망에 빠지고, 그것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위대한 인간이나 집단을 추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는 독재자나 폭군에 의해 억압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근대 이전에는 무력으로 가능했지만 현대의 전체주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는 1930년대 당시 유럽을 휩쓴 절망-경제불황, 실업, 미국 대공황, 전쟁, 기독교 등 전통적 권위의 해체 등- 을 원료로 당시 제도에서는 합법적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드러커는 기관과 전체주의를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 기관은 정상적인 사회의 핵심요소입니다. 기능하는 기관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지켜 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영의 의의가 드러납니다. 경영은 기능하는 기관을 만드는 인간의 노력이자 지식입니다. 효과적인 경영을 통해 기관은 목적을 달성하고 결과를 만들고, 정상적으로 기능합니다. 바로 이것이 경영이 다원사회, 민주적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의입니다. 경영은 기관이 정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장치이자 핵심요소이고 책임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커에게 경영과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조직사회에서 오직 효과적인 경영만이 올바른 사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만들어야 한다고 드러커는 통찰했습니다.

 

특히 기업은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곳이자, 가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기업을 단지 경제적 맥락에서만 인식하는 것은 협소한 차원을 넘어서서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의는 다른 기관도 동일합니다. 다양한 조직은 모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사회에 기여합니다.

 


경영의 빛과 그림자

 

. 그렇다면 경영은 어떻게 이러한 의의를 실현하는 것일까요? 경영은 효과성, 효율성, 생산성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통해 이를 달성합니다. 개인이 가진 잠재력이 조직을 통해 실현되며, 그것도 인간의 삶과 문명에 도움이 되는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경영의 바탕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드러커는 경영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영을 제대로 하는 것이 경영자의 책임과 역할입니다. 다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경영의 성공보다는 실패사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기서 실패라는 말로 지적하고 싶은 의미는 단순히 돈을 못 벌었다는 것, 즉 경제적 성과를 산출하는데 실패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질적인 측면, 즉 경영의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경영자에 대한 불신을 포함해서죠. 사실 조직 내에서든 사회로부터든 경영자에 대한 존경보다는 불신이 더욱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기업 경영자들을 만나 뵙게 되면 성공한 기업가에 대한 사람들의 냉대에 실망한다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기업과 경영자를 비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실망스럽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이들 중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이 이룩한 경제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을 볼 때, 그리고 더욱 더 많은 기업이 엄청난 부를 쌓고 있는 현실로 보면 경영자에 대한 신뢰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현상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매우 정당하고 또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엔진인 기업과 경영에 대한 불신은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불황 같은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가 아니라 체제 자체에 대한 위기를 지적하는 의견이 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폴 라이시는 <자본주의를 구하라>는 책에서 현대의 자본주의는 소수만을 위한 자본주의로 변질했다고 비판합니다. 자본주의는 승자들이 만든 규칙이 지배하는 불공정한 게임이 되고 있고, 이대로 간다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비극적 전망을 지적합니다. 사회가 없다면 자본주의도 없다는 암울한 전망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영에 대한 비전

 

오늘날 기업들이 자신만이 우물에서 나와 사회적 책임을 말하고 다양한 형태로 노력하는 움직임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대학이나 병원 같은 대형 비영리기관도 경영의 책임과 성과에 대해서 진진한 반성과 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비영리단체(NG0)가 다양한 분야에서 점점 더 역할을 확대하는 흐름도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기업의 역할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은 현대 사회의 핵심기관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단지 이윤의 사회 환원, 기업의 브랜드이미지 제고라는 차원에서 책임을 인식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드러커로 보면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수행하는 여러 활동 중의 일부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기업활동의 한 영역으로 이해하고서는 법을 준수하거나 또는 기업이 창출한 부의 분배로 할 일을 다했다고 간주하는(물론 이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사회가 기업에게 기대하는 포괄적인 책임이자, 기업이 자율성을 부여 받은 이상, 기업조직 전체의 활동과 결과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나고 수행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 사회적 책임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사회에 해를 미치지 않고 제대로 제공하고, 동시에 기업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기업이라는 기관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기업이라는 공간에서 실현할 책임이 기업이 부담하는 사회적 책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기업, 선량한 기업시민이라는 것은 사실 우스꽝스러운 표현입니다. 단지 책임을 다하는 기업, 기업의 모든 활동에서 책임을 실천하거나 책임을 방기하는 기업만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경영자는 탁월한 성과라는 경제적 책임,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하는 기업의 책임, 구성원의 성장과 자기실현에 대한 책임을 구현하는 경영이 자신의 역할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저는 사회와 기업, 조직과 경영, 인간과 경영이라는 맥락에서 경영을 생각할 때, 조직이 제 할 일을 다하고 사회와 바람직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사회라는 넓은 무대에서 경영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경영이란 단지 조직의 목표만을 달성하는 장치라고 한정했던 경영자라면 생소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영의 무대가 조직이라는 것은 경영이란 조직이 발을 디디고 있는 사회- 사람들이 먹고 입고 잠자는, 그러면서 꿈을 꾸고 자신을 실현하는 사회-를 향하는 것이라는 불변의 조건을 깊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조직의 목적은 사회에 있고, 사회와 무관하게 혹은 사회를 거슬러 조직의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그 존재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사회가 좀더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영이 이루어 질 때 좀 더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업은 기업답게, 대학은 대학답게, 병원은 병원답게, 종교단체는 종교단체답게. 정부는 정부답게. 이것이 제가 가진 회에 대한 비전이자 경영에 대한 비전입니다.



Action point

  

나는 왜 경영을 하는가를 자문해 본다.

경영을 통해 산출한 결과가 나에게, 조직에게,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어떠한 사회 비전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내가 일하는 조직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가를 생각해 본다.


Keyword: 사회에 대한 비전, 정상적인 사회, 기능하는 사회, 전체주의 사회, 경영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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