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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탁월함을 위한 도구_문해력

글쓰기 1_쇼펜하우어, 니체의 문장론

by 문정엽/드러커연구가 2016.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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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쓰는 방법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내가 생각하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2. 쉽고 단순하며 명쾌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다.

3. 글을 통해 좋은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어떻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지혜를 정리한다. 두고두고 새겨 둘 가치가 있다. 글쓰기에 대해 문장의 대가들이 말한 그대로를 옮긴다.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발췌/요약)

2016.6.7/2023.6.1

책 발췌 - 쇼펜하우어, 니체 문장론.pdf
0.24MB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홍성광 역, 연암서가, 2013.4.25.

쇼펜하우어 글 출처
<소품과 부록> 중 ‘스스로 생각하기’, ‘글쓰기와 문체’, ‘책과 글 읽기’, ‘박식함과 학자에 대하여’에서 발췌
니체 글 출처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아침놀>, <즐거운 학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학> 발췌

내가 배운 것:

사고하고 나서 쓴다. 
소박함과 숭고함은 통한다.
단순하고 단호하게 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말)로 표현한다. 
비유는 신선해야 한다. 

해설) 좋은 글쓰기는 스스로 생각하기, 독자적 사고, 독창성에서 출발한다.

Jay) 맞는 말이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 믿음, 주장이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다만 글은 활자로 옮겨지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수고가 쉽지 않다.   
 쇼펜하우어, 자신의 책에 대한 자부심

작품의 가치에 따라 값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 될 것입니다.” (1818년 주요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발간 시 출판인 브로크하우스에 보낸 편지 중에서)

 아포리즘 형식으로 글을 썼던 니체
아포리즘 aphorism: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해서 다르게 생각하도록 요구함. 사전적 정의로는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 격언, 금언, 잠언, 경구 따위를 말한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그 글이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산에서 산으로 갈 때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다리가 길어야 한다. 그리고 잠언은 봉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집이 크고 키가 껑충 큰 자라야 잠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니체의 말에 의하면 잘 쓴다는 것은 사고를 더 잘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체의 중요성
니체는 위대한 문체란 아름다운 것이 괴물에 승리를 거둘 때 생겨나며, 좋은 문체란 좋은 인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문체란 “정신의 관상” (쇼펜하우어)
문체에 대한 가르침은 열정을 극복한 인간, 진심으로 감동하고 정신적으로 즐겁고 밝으며 솔직한 인간의 기분에 대한 표현을 얻게 해주는 것이다.
니체는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온갖 다양한 문체를 선택한다.

“나의 문체 기법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어떤 상태를, 기호의 속도를 포함하여 기호를 통한 파투소의 내적 긴장을 전달하는 것이 모든 문체의 의미다. 나의 경우 내적 상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의 경우에는 문체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다룬 것 중 가장 다양한 문체 기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술가의 종류(쇼펜하우어)
사물 그 자체 때문에 쓰는 사람과 쓰기 위해서 쓰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어떤 생각을 지녔거나 경험을 해서 그것을 전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 글을 쓴다. 후자는 돈이 필요해서 돈 때문에 글을 쓴다. 이들의 글에는 단호함과 명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사고를 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하거나, 남의 책을 이용해서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사고하는 사람: 쓰기 위해 사고한다. 그 수는 매우 많다.
사고하고 나서 쓰는 사람: 사고를 했기에 글을 쓸 뿐이다. 이들의 글쓰기는 몰이사냥과 같아서, 짐승이 이미 우리 속에 잡혀 들어가 있으므로 사낭꾼은 목표를 정하여 쏘기(서술)만 하면 된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웃고 춤추는 것을 가르치는 책을 원한다.
쇼펜하우어의 글에는 잔잔한 웃음과 유머, 기지가 있다.

웃음은 매번 어떤 개념과 그로 인해 생각된 실재의 객관 사이의 불일치를 갑자기 알아차린 데서 생긴다.”

니체는 중력의 정신을 떨치고 경쾌하게 춤추라고 가르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서술하고, 윤리적인 것과 독창적인 것에 관해 마치 양자가 하나의 깨우쳐주는 변덕이나 취향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발끝으로 서서 내부의 흥 때문에 춤추지 않을 수 없을 때처럼, 생기발랄한 자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필가들이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의 소박함 찬양
소박함은 숭고함과도 화합하므로 단순함과 소박함의 법칙은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니체 역시 거창하게 쓰는 것보다 쉽고 소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소박한 생활방식은 오늘날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색과 독창력이 필요하다.” -니체

“모든 실제적인 사상가는 자신의 사상을 가능한 한 순수하고 분명히, 확실하고 간결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단순함은 언제나 진리의 특징일 뿐 아니라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체는 사상의 아름다움을 보존한다.” -쇼펜하우어

본문 발췌 (전체 요약은 파일 참조)

 

쇼펜하우어 문장론
 01 스스로 생각하기
-사고와 지식
자신의 사고로 철저히 다듬은 지식이 아니라면 양은 훨씬 적어도 다양하게 숙고한 지식만큼 가치가 없다.

-독자적 사고와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독자적 사고는 자기 자신의 충동을 따른다.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을 몽땅 뺏어간다. 
학자란 책을 많이 읽은 자들이다. 사상가, 천재, 세상 사람을 깨우쳐주는 자, 인류의 후원자는 직접 세상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독서에서 얻은 생각
자신의 기본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깃든다. 독서에서 얻은 남의 생각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이나 남이 입다가 버린 옷에 불과하다. 독서는 독자적 사고의 단순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
독자적 사고를 하고, 자발적으로 생각하며, 올바로 생각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나침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사고의 샘이 막혀 버렸을 때만 독서를 해야 한다.
책을 집어 들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쫓아 버리는 사람은 말린 식물 표본을 보려고, 또는 동판화 속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고 야외에서 도망치는 사람과 같다.
(독자적 사고를 해야만) 진리는 불가결의 부분이자 살아있는 구성 요소로 우리 사고의 전체 체계에 들어와서, 그 사고 체계와 완전하고 확고한 관련을 맺으며, 그 근거와 결론이 모두 이해되어 우리의 전체 사고방식의 색깔, 색조, 특징을 띠기 때문이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소유하려면, 그대가 그것을 획득하라.”(괴테, <파우스트>, 682행)
단순히 습득한 진리는 마치 의수, 의족, 의치, 밀랍으로 만든 코/ 독자적 사고로 얻은 진리는 수족과 같다.

-자기 머리로 사고하기
독서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학문적 사상가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고, 때문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하겠지만, 그의 정신은 이 모든 일을 해내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사상 체계에 병합함으로써, 끊임없이 커지는 자신의 웅대한 통찰력의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체에 그 지식을 종속시킬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지혜가 독서로 얻은 지혜보다 낫다.
독서로 일생을 보내고 여러 가지 책에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여행 안내서롤 잔뜩 읽고 어느 나라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은 사람과 같다. 일생을 사고하며 보낸 사람은 직접 그 나라에 갔다 온 사람과 같다.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책에만 매달리는 철학자
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철학자와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의 관계는 역사 연구가와 목격자의 관계와 같다

-책상머리 바보
독자적 사고가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다. 생각도 사람과 마찬가지라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야 한다. 억지로 생각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각할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중요성
독서할 때보다 현실 세계를 바라볼 때 독자적 사고를 할 계기와 기분이 훨씬 빈번히 일어나므로 책을 읽느라 현실 세계의 모습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단순한 경험도 독서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기

제1급의 정신을 가진 소유자들의 특징적인 자질은 모두 직접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그들은 독일 제국에 직속된 영주들처럼 정신의 제국에 직속되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영주에 예속되어 있다.
진정으로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군주와 같다.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결정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은 군주의 결정처럼 자신의 절대적 권력에서 유래하며, 자기 자신에게서 직접 출발한다.

-생각을 연인처럼 잡아 두어라
현재 어떤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눈앞에 연인이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이 연인에 결코 무관심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안 보면 잊어버리는 법이다! 아무리 멋진 생각이라도 적어 두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진정한 사상가와 소피스트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사고하는 사람과, 남을 위해 사고하는 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자가 진정한 사상가이며,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서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철학자인 것이다.
-생각하는 존재
애매하고 괴로우며 덧없는 꿈같은 생존의 문제는 너무나 크고 절실하다.
몇몇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은 이런 문제를 분명히 의식하지 않으며, 심지어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인간은 매우 넓은 의미에서만 생각하는 존재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02 글쓰기와 문체
 

-두 종류의 저술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저술가가 있다. 사물 그 자체 때문에 쓴 사람과 쓰기 위해서 쓰는 사람이 그것이다. 전자는 어떤 생각을 지녔거나 경험을 해서 그것을 전달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후자는 돈이 필요해서 돈 때문에 글을 쓴다. 이들을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한다. 이들의 글에는 단호함과 명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원고지를 메우기 위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속이는 셈이다.
“명예와 돈은 같은 자루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스페인의 격언은 옳다.

-저술가의 세 가지 유형
세상에는 세 부류의 저술가가 있다.

사고를 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하거나, 남의 책을 이용해서 글을 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많다.
글을 쓰면서 사고하는 사람: 쓰기 위해 사고한다. 그 수는 매우 많다. 운을 하늘에 맡기고 떠나는 사냥꾼에 비유할 수 있다. 사냥을 많이 하고 집에 돌아오기란 어려울 것이다.
사고하고 나서 쓰는 사람: 사고를 했기에 글을 쓸 뿐이다. 매우 드물다. 이들의 글쓰기는 몰이사냥과 같아서, 짐승이 이미 우리 속에 잡혀 들어가 있으므로 사낭꾼은 목표를 정하여 쏘기(서술)만 하면 된다.

미리 생각하고 글을 쓰는 소수의 저술가들 중에도 사물들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외의 사람은 단지 책이나 다른 사람이 이미 말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극소수의 사람은 사물 자체를 통해 생각하도록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직접 사물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에 한 말이 항상 옳은 말이고, 나중에 쓴 글은 모두 이전에 쓴 것을 개선한 글이며, 모든 변화가 진보라고 믿는 것만큼 큰 잘못은 없다.
사고하는 두뇌의 소유자, 올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 진지하게 사안을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에 불과한 반면, 세상 어디서나 버러지 같은 인간이 일반적 규칙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얻으려는 자는, 학문이란 언제나 진보한다고 전제하거나, 이 책을 쓸 때 이전의 책들을 이용했으리라 전제해서 대뜸 그 문제를 다룬 최신 서적만 움켜잡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제목의 중요성

책의 제목이 필요한 이유는 독자가 책의 내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책의 제목은 눈에 띄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책의 제목은 본질적으로 짧으므로 간단하고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될 수 있는 한 책 내용의 모노그램 역할을 하게 된다.
가장 나쁜 제목은 도용한 제목이다. 첫째로 표절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저자에게 독창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을 가장 설득력 있게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문체와 관상
문체는 정신의 관상이다. 정신의 관상은 신체가 주는 인상 이상으로 진실하다.
타인의 문체를 모방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과 같다. 가면은 생명이 없다.
생기 있는 얼굴이 가면보다 낫다.
허세를 부리는 문체는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문체의 독자성
사고의 방식, 그 사고의 이런 본질적인 성질과 일반적인 질의 정확한 복제물이 그의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체는 한 인간이 지닌 모든 사상의 형식적인 성질이다.
문필가가 무엇에 대해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든 언제나 문체는 똑같아야 한다. 문체는 반죽과 비슷하다.
평범한 문필가는 자신에게 고유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를 숨기려고 한다. 소박함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각하므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우월한 정신의 소유자들의 특권으로 남는다.

-평범한 저술가의 글쓰기
평범한 저술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때로는 조금씩 짧고 다의적이며 역설적인 잠언으로 내던진다.
그들은 마음대로 어떤 글쓰기 방법을 상정해서 그것을 고상하다고 간주하며 전력을 기울인다. 예컨대 철저하고 학구적인 글쓰기 방법 말이다
길게 늘어지고 깊은 생각이 결여된 복합문은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내며 읽는 사람을 죽도록 고문한다.
“태산명동에 서일필” nascetur ridiculus mus 크게 떠벌리기만 하고 실제의 결과는 작은 것 (호라티우스 시론 138~9행)’

새롭거나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표현, 관용구, 각종 합성어에 의해 정신의 외관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다. 정신의 부족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끼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글쓰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친근하게 여겨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때 지력이 필요한 것이다.

“현명해야 올바른 글을 쓸 수 있다.” (호라티우스, <시론>)

더 많은 지력을 보이려는 가시적인 노력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다.

단순함은 언제나 진리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천재의 특징이기도 했다. 문체는 사상의 아름다움을 보존한다.

-간결한 문체, 구체적인 표현

풍부한 사상을 지닌 훌륭한 문필가는 무언가 말할 게 있어서 말을 한다는 신뢰를 금방 독자로부터 얻는다.
문필가는 실제로 무언가 말할 것이 있으므로 언제나 가장 간결하고도 단호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나의 사상은 항시 밝은 대낮에 모습을 드러내고, 나의 시는 좋은 나쁘든 항시 무언가를 말하노라
(부알로 Nicolas Boileau, 1636~1711, 프랑스 고전문학 이론의 대표자)

말이 많은 자는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지루함과 주관적인 지루함

지루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객관적인 지루함은 언제나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 부족한 경우, 그러니까 전달할 완전히 명료한 사상이나 인식이 저자에게 전혀 없을 경우에 생겨난다. 그런 것을 지닌 저자는 그것을 전달하려는 목표에 곧장 매진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어디서나 명백히 표현된 개념을 전달하고, 따라서 장황하지도 내용이 없지도 혼란스럽지도 않기에, 따라서 지루하지 않다.
반면에 주관적인 지루함은 단순히 상대적인 지루함이다. 독자가 저자의 글에 관심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의 관심이 협소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탁월한 글에도 어떤 글이든 주관적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형편없는 글이라도 어떤 글이든 주관적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비범한 사상을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문장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문장은 언제 어디서나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하다는 반증이다.
십중팔구는 사상이 불명료한 때문이며, 사상이 불명료한 것은 다시 거의 언제나 사상의 원래적인 부적절, 모순, 즉 오류에서 기인한다.
알쏭달쏭한 표현을 삼가야 하며, 나의 사실을 말하려 하는지, 또는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언어 역시 사상을 파악하기 쉽게 해주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것의 효용도 어느 정도까지만 그러하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사용하다 보면 언어는 전달해야 할 사상을 다시 점점 모호하게 만든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문체의 임무이며 판단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테르는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라고 말한다.

-간결한 표현의 중요성과 잘못된 간결함
저술가는 독자의 시간과 노력, 인내력을 낭비시켜서는 안 된다.
차리리 좋은 글이라도 문맥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절반이 전체보다 낫다”는 헤시오도스의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인즉 저술가가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독자를 지루하게 만드는 비결은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는 데 있다,”(볼테르의 <인간론>)

얼마 안 되는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어디서나 평범함을 드러내는 틀림없는 징표이다. 반면에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는 많은 사상을 얼마 안 되는 말로 마무리 짓는다.

-명확하고 정확한 표현
표현을 명확하고 정확히 하려면 사상의 모든 뉘앙스나 변조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언어에 가치를 부여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상을 자루 속이 아닌 적은 의복 속에서처럼 나타나게 해야 한다.
작가는 독자와 대화를 하듯 글을 써야 한다. 상대방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 만큼 그럴수록 더욱 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
작가는 사상이란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항시 명심해야만 한다. 머리로 생각한 사상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종이에 쓰인 것을 머리에 옮기는 것보다 훨씬 쉽다.  
(글에서 형상이 아니라 얼룩을 본다)
-비유
비유는 미지의 관계를 기지의 관계로 환원시킬 때 큰 가치가 있는 표현법이다.
모든 개념 형성은 기본적으로 비유에서 출발한다. 여러 사물의 비슷한 점을 파악하고 비슷하지 않은 점을 내버리는 것에서 개념 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이해를 막론하고 이해란 결국 관계의 파악이 그 본질인 것이다.
상이한 경우나 완전히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관계를 인식하는 경우 모든 관계를 더욱 분명하고 순수하게 파악할 것이다. (관계의 모든 종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며 보다 깊고 완전한 인식을 하게 된다)
비유는 인식을 위한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놀라우면서도 적절한 비유를 내세우는 것은 깊은 지성의 증거이다.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일이다. 비유만은 다른 삶에서 배울 수 없으며, 그것은 천재적인 천성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좋은 비유를 들기 위해서는 같은 성질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철학에서도 확연히 다른 사물에서조차 같은 성질을 발견하는 것은 명민함의 징표이다.” (수사학)

 
 
<책과 글 읽기>
 -무지한 부자는 짐승과 같다
무지한 부자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만 살아가며, 그런 자는 짐승과 같다.

-생각하지 않는 독서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학생이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이 연필로 그러 놓은 선을 따라 펜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우리의 머리는 실은 타인의 생각이 뛰어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다.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망치고, 따라서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도 자양분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영양 과잉으로 질식해 버린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만큼 읽은 흔적이 정신에 적어지기 때문이다.
되새겨야만 읽은 것이 자기 것으로 된다.
끊임없이 책만 읽고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읽은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종이에 적힌 생각은 모래 속에 남은 보행자의 발자국과 다름없다.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면 자기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독서의 역기능
저술가에게는 예컨대 설득력, 다양한 비유 능력, 비교의 재능, 표현의 대담성이나 신랄함, 간략함이나 우아, 경쾌함, 그리고 기지, 대조의 수완, 간결한 표현과 소박함 등과 같은 특성이 있다.
이런 재능을 지닌 저술가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서는 우리 자신이 지닌 천부적 재능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이때 언제나 천부의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고전을 읽어라!
“열심히 고전을 읽어라, 진정으로 참된 고전을!
최근에 나온 글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고전을 읽어라! 참으로 가장 오래된 고전을
현대인이 칭찬하는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슐레겔 <고대연구>)

(나는 이미 젊은 시절 슐레겔의 멋진 경구를 접하고, 나의 좌우명으로 삼게 된 운명에 감사하고 있다.)

-올바른 책의 선택
누구나 자신의 사고체계나 그것의 목적에 맞는 것만을 간직한다.
누구에게나 목적은 있지만 사고체계와 비슷한 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에도 객관적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독서를 해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게 좋다.
작품은 어떤 정신의 진수다. 작품은 정신을 훨씬 능가하고 앞지른다.
정신을 위한 청량제로는 옛 고전을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두 가지 역사, 즉 정치의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있다. 전자는 의지의 역사이고, 후자는 지성의 역사이다.

정치의 역사는 대개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정치사는 불안과 곤궁, 사기, 끔찍한 살인으로 차 있다. 반면 문예사는 길을 잘못 헤매는 경우조차 고독한 지성처럼 어느 부분이나 즐겁고 명랑하다. 문예사의 주요 분야는 철학의 역사이다. 사실 철학사는 심지어 다른 역사에까지 울려 퍼져, 거기서도 밑바탕에서 견해를 이끌어가는 기본 저음이다. 철학사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니체의 문장론>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정신과 사상가)
-정신을 드러내기
자신의 정신을 드러내려는 자는 누구든 그 반대의 것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킨다.

-세 종류의 사상가
광천에는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 막힘 없이 흘러나오는 것, 뚝뚝 떨어지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문외한은 광천을 물의 양으로 평가하고, 전문가는 물에 함유된 성분, 측 광천 속의 물이 아닌 것에 따라 평가한다.

-선택된 사상
선택된 문체는 말뿐만 아니라 사상도 면밀히 선택한다. 더구나 말과 사상 양쪽 모두 통례적인 것과 주도적인 것에서 선택한다. ~ 나중에는 양쪽 모두에서 평범한 냄새가 나기 쉽다.

-여행자와 그 등급
여행자에게는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여행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흡사 장님과 같다. 다음 등급은 실제로 세상을 구경하는 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로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들이다.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체득한 뒤 집에 돌아온 즉시, 또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행동이나 일에서 반드시 발휘해 나가야 한다.
인생의 여로를 걷는 모든 인간은 이 다섯 종류의 여행자와 같다.

-깊이와 탁함
대중은 탁한 곳에서 낚아 올리는 자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자를 곧잘 혼동한다.

-거미 같은 세 명의 사상가
모든 철학 학파에는 다음과 같은 세 명의 사상가가 잇달아 나타난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몸에서 체액과 정액을 만들어내고, 두 번째 사람은 그것에서 실을 뽑아 정교한 그물을 만든다. 세 번째 사람은 이 그물 속에 숨어 자기에게 걸려드는 제물을 노린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한다.

-예술가의 진리감각
예술가는 진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사상가보다 도덕성이 약하다. 예술가는 삶에 대한 찬란하고 심오한 해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에 가장 효과적인 전제들, 즉 환상적인 것, 신화적인 것, 불확실한 것, 극단적인 것, 상징적인 것에 대한 감각, 개인의 과대평가, 천재에게 있는 뭔가 기적 같은 것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독창적인 두뇌
진정으로 독창적인 두뇌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뭔가 새로운 것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 익히 알려진 것, 누구나 보았지만 간과해 온 것을 새로운 것인 양 보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의욕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기를 의욕하라, 그러면 자기가 될 것이다”라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알기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때때로 자신을 잃었다가 다시 발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풍부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
풍부한 정신을 가지면 젊음이 유지된다. 하지만 이때 실제보다 더 늙어 보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글쓰기와 문체>
-잘 쓰는 법을 배우기
더 잘 쓴다는 것은 더 잘 사고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말은 전달할 가치가 더욱 큰 것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글을 쓰거나 가르칠 때의 주의사항
문필가에 의해 전달 가능한 것만 가려서 배운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문필가나 대중을 생각한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의 위험)
교사) 자신을 지식의 통로로, 흔히 수단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자신에 대한 진지성을 잃어버린다.

-가장 좋은 문체에 대한 가르침
문체에 대한 가르침은 독자나 청자에게 온갖 기분을 전달해 주는 표현을 얻게 하는 가르침 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한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기분에 대한 표현을 얻게 하는 가르침이다.
문체에 대한 가르침은 열정을 극복한 인간, 진심으로 감동하고, 정신적으로 즐겁고 밝으며 솔직한 인간의 기분에 대한 표현을 얻게 해주는 가르침이다. 좋은 문체는 좋은 인간에서 나온다.

-사라진 예술 준비
김나지움에서 행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라틴어 문체의 연습이었다. 그야말로 예술연습이었다.
문체연습과 서술 연습을 구별하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 (독일어 작문에 의한 사고 연습)

문장의 걸음걸이는 저자가 지쳐 있는지 어떤지를 보여 준다. 괴테는 피곤한 경우에는 자주 구술하곤 했다.

-피하기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차량을 운전할 때 피하거나 차로를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전복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빵과 같은 것
모든 예술 작품에도 그 안에서 상이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뭔가 빵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예술 작품이 가끔 충분한 휴식이나 중간 휴식 없이 잇달아 계속되어, 사람들을 금방 지치게 하고 염증을 일으킨다면 비교적 오랫동안 예술을 식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장 파울(Johann Paul Friedrich Richer, 1763~1825) 독일 소설가 <티탄>
장 파울은 아는 것은 무척 많았지만, 학식은 없었다. 갖가지 예술적 기교는 통찰하고 있었지만 예술을 갖는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고 여겼지만, 정작 취미는 없었다. 감정과 진지함은 지녔지만, 그것을 남에게 맛 보일 때 그 위에 역겨운 눈물의 소스를 쳤다.
그는 비로 기지가 없기 때문에 독자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전체적으로 그는 실러와 괴테라는 부드럽고 비옥한 토지에 하룻밤 새 쑥쑥 자라는 냄새 독한 알록달록한 잡초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하나의 재앙, 모닝 가운을 입은 재앙이었다.

-반대되는 것도 맛보기
과거의 작품을 그것의 동시대인이 느꼈던 것처럼 즐기기 위해서는 그 작품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였던 당시의 지배적인 취향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고도 유익하게 쓰라
정동의 변화, 실행, 색채 변화,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저자에게 선사한다. 저자 자산이 우리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경우, 우리 독자는 이런 것을 가지고 그의 저서에 도움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단어의 냄새
단어마다 고유한 냄새가 있다. 냄새끼리의 조화와 부조화가 있듯이, 단어끼리의 조화와 부조화도 있다.

-관례
호메로스가 쓴 것의 4분의 3은 관례이다. 관례란 청중의 이해를 얻기 위한 예술수단이고, 힘겹게 습득한 공통언어이다. 예술가는 그런 공통언어로 자신의 뜻을 실제로 전달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관례의 굴레를 넘어 창안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내놓으면서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생각을 개선하기
문체를 개선하는 일은 생각을 개선하는 일을 뜻하며,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문체를 망치는 주요 요인
어떤 사물에 대해 실제로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느낌을 나타내려고 할 때 언어나 모는 예술에서 양식을 망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그 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감정이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냉정하게 드러낼 때 감정의 표정은 아름답게 변용하는 것 같다.

-조감(鳥瞰)
이곳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흘러드는 급류들이 하나의 깊은 구멍을 향해 돌진한다. 주위의 숲으로 덮인 산비탈은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도망치는 것 같다.
이런 지역은 도저히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새처럼 공중을 떠돌며 내려다보고 있다면 몰라도.
조감은 예술적인 자유 재량이 아니라 유일한 가능성인 것이다.

-과감한 비유
과감한 비유가 문필가의 경솔함의 증거가 아니라면 그것은 그의 상상력이 피곤에 지쳤다는 증거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런 비유는 문필가의 취향이 조악하다는 증거이다.

-쇠사슬 달고 춤추기
그리스의 모든 예술가, 작가, 문필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가 자신에게 부과하고, 그가 동시대인에게 매력적으로 만든(그래서 모방자를 낳은) 새로운 구속은 무엇인가? 왜냐하면 ‘발명’(예컨대 운율상의)으로 불리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얽매는 그런 족쇄이기 때문이다.
‘쇠사슬 달고 춤추기’, 즉 자신을 힘들게 만든 다음 경쾌함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그들의 곡예이다.

-글을 쓴다는 것과 승리하려고 하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승리를 알리려는 것이어야 한다. 더구나 타인의 이익이 되도록 전달하며 자기 자신의 극복을 알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소화불량증의 저자가 있다. 이들은 무엇인가 그들의 위에 걸려 있을 때만 글을 쓴다. 이들은 타인에 대해 승리하려고 한다.

<독자와 저자>
-애처로운 저자와 진지한 저자
자기가 고민하는 문제를 쓰는 저자는 애처로운 저자가 된다. 그러나 자기가 고민했던 문제, 그리고 지금은 어째서 기뻐하며 편히 살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는 작가는 진지한 저자가 된다.

-저자들의 충만함
훌륭한 저자가 마지막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 충만함이다. 가장 좋은 경주마는 승리를 거둔 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여윈 상태로 있는 것이다.

-병약의 효용
자주 앓는 사람은 그만큼 자주 건강을 회복하는 까닭에 건강한 상태를 훨씬 크게 향유한다.
병약한 문필가들의 저작은 건강에 대한 훨씬 확실하고도 균형 잡힌 색조를 띠곤 한다. 그들은 정신적 건강과 쾌유의 철학 및 그 스승, 즉 오전, 햇빛, 숲과 샘물에 통달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에서의 감성
관객이나 청중의 감성은 예술가의 감성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양자는 기껏해야 한 점에서만 서로 만나게 된다.

-예술에 관해 바라는 것
어떤 이는 예술에 의해 자신의 본질을 즐기려 하고, 다른 이는 예술의 도움을 빌려 때때로 자신의 본질을 넘어,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천재와 졸작
예술가들 중에서 자신에게서 퍼내는 독창적인 두뇌의 소유자들은 사정에 따라 완전히 공허하고 진부한 것을 만들어 낼지 모른다. 반면에 보다 종속적인 천성의 소유자들, 소위 재사들은 온갖 좋은 것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어 그럭저럭 괜찮은 것을 만들어 낸다.

-학문에 대한 관계
자기 자신이 학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야 비로소 학문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학문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기지
가장 기지에 넘치는 저자는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독자의 정신을 거스르는 죄
저자가 단지 독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자신의 재능을 부정하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는 유일한 죽을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에게 온갖 험담을 해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세워줄 줄 알아야 한다. (?)

-최상의 저자
문필가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최고의 저자가 될 것이다.

-좋은 문필가의 특징
좋은 문필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경탄받기보다는 오히려 이해되기를 선호한다. 또한 그들은 신랄하고 너무 예리한 독자를 위해 애쓰지 않는다.

-선택된 현실
훌륭한 산문 작가는 일상용어에 속하는 말만을 취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상 용어의 모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선택된 문체가 생긴다.
그(미래의 훌륭한 시인) 현실만을 취하지만, 모든 현실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현실만 취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쓰기
분별 있는 저자는 어떤 다른 후세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세, 즉 자신의 만년을 위해 쓴다. 그때 가서도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

<책과 글 읽기>
-양서는 때를 기다린다.
모든 양서는 세상에 나왔을 때 떫은맛을 낸다. 양서는 신기함이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저자와 그의 책을 혼동한다.
양서에 담긴 정신, 감미로움, 찬란한 금빛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라나는 세대, 그 뒤에는 옛 세대, 이윽고 후대에 전승된 세대의 숭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분명히 드러난다.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고, 많은 거미가 책에 많은 거미줄을 쳐두어야 한다. 좋은 독자는 책을 점점 좋게 만들어 주고, 좋은 적수는 책을 정화시켜 준다.

-맹세
나는 책을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작가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 사상이 부지불식간에 책으로 된 작가의 책만 읽을 생각이다.

-춤추는 것을 가르치는 책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서술하고, 윤리적인 것과 독창적인 것에 관해 마치 양자가 하나의 변덕이나 취향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발끝으로 서서 내부의 흥 때문에 춤추지 않을 수 없을 때처럼, 생기발랄한 자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필가들이 있다.

-위험한 책들
견해가 바뀌었다고 인간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뀐 견해는 그의 인격이라는 별자리의 하나하나의 측면을 비추어 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견해들이 다른 별자리에 있을 때는 애매하고 알아채기 어려웠다.

-말문을 여는 자
많은 사람들이나 책들의 가치는 누구든 가슴속 깊이 숨겨둔 것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성질에 있다. 이런 사람과 책은 말문을 여는 자이고 굳게 다문 이빨을 열게 만드는 쇠지레이다.

-4분의 3의 힘
작품이 건전한 인상을 주려면 작가는 기껏해야 자신이 지닌 역량의 4분의 3만 발휘하면 된다. 그가 자신의 극단적인 한계까지 갔을 때는 그의 작품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긴장에 의해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우수한 작품은 뭔가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이 있고, 초원의 암소처럼 누워 있다.

-정직한 책의 가치
정직한 책은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

-가장 날카로운 비평
어떤 인간이나 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평은 그 인간이나 책이 지닌 이상을 적시하는 일이다.

-독일 산문의 보배
괴테의 저서, 특히 괴테의 <에커만과의 대화>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독일 책이다.

<아침놀>
-경험의 바로 곁에서!
위대한 정신들도 다섯 손가락 너비의 경험밖에 하지 못한다. 경험의 바로 옆에서 그들의 생각은 멈춘다.

-과장된 문체
자신의 고조된 감정을 작품에 발산해서 홀가분해하지 않고, 오히려 팽창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예술가는 지나치게 허식을 부리는 자이다.

-사상가는 얼마만큼 자기의 적을 사랑하는가
그대의 사상에 반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제지하거나 그대에게 숨기지 마라! 그것을 서약하라! 그것은 사고의 으뜸가는 솔직성에 속한다. 그대는 매일 그대 자신을 상대로 원정에도 나셔야 한다. 승리와 정복한 성채는 더 이상 그대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대의 패배 역시 더 이상 그대의 문제가 아니다.

-순수하게 만드는 눈
플라톤, 스피노자, 괴테의 경우처럼 정신이 성격이나 기질과 단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만 ‘천재’라 부를 수 있으리라. 이들의 경우 정신은 날개 달린 존재로서 성격이나 기질로부터 쉽게 분리될 수 있고, 그러면 성격과 기질의 훨씬 위에 우뚝 올라설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의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길에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위대하며, 가장 보편적인,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우주적인 표현을 할 줄 알았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생생히 말했다. 이런 천재들은 자신의 위로 날아오를 수 없었지만, 자기들이 어디로 날아갈지라도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이 그들의 위대성이고, 또 위대성일 수 있다.
천재라는 이름이 더 실제로 어울리는 다른 사람들은 순수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눈을 지니고 있다. 이 눈은 신을 바라보듯 세계를 바라보며 이 신을 사랑한다.

<즐거운 학문>
사상, 사상은 우리 감각의 그림자이다 사상은 항상 감각보다 모호하고 공허하며 단순하다.

-번역
한 시대가 지닌 역사 감각의 수준의 이 시대가 번역을 어떻게 하고, 지나간 시대와 책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로 평가할 수 있다.
코르네유 시대의 프랑스인과 혁명 시대의 프랑스인 역시 고대 로마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고대 로마는 고대 그리스의 모든 훌륭하고 고귀한 문화에 얼마나 폭력적인 동시에 소박하게 손을 댔던가? 그것을 어떻게 로마의 현실로 옮겨 놓았던가?

-빛과 그림자
책과 글은 다양한 사상가들에게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상가는 빛들을 책에 모았는데, 그는 자신에 번쩍이는 인식의 광선에서 빛을 재빨리 훔쳐내어 가져올 줄 알았던 것이다. 다른 사상가는 낮 동안 그의 영혼에 형성된 것으로부터 회색과 검은색의 잔상인 그림자만을 재현할 뿐이다.

-산문과 시
산문의 위대한 대가들은 항상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정말이지 우리는 시와 대면할 때만 좋은 산문을 쓸 수 있다!
산문의 온갖 매력은 부단히 시에서 벗어나고 시와 모순된다는 데 있다.
모든 무미건조함과 냉정함은 사랑스러운 여신을 사랑스러운 절망에 빠뜨려야 한다.
전쟁은 모든 좋은 것의 아버지이고, 좋은 산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체 왜 글을 쓰는가?
A: 나는 펜을 잉크에 적시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글쓰기에 화가 나거나 창피를 느낀다. 글쓰기는 내게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B: 그대는 왜 글을 쓰는가? 지금까지 내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수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머슨
나는 어떤 책에서도 에머슨의 책에서만큼 내 집처럼 편안히 느낀 적이 없었다.

-이해의 문제에 대하여
글을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분명 이해되지 않기를 원하기도 한다.
저자는 ‘어느 누구나’ 자기 책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다.
보다 고귀한 정신과 취향을 지닌 사람은 모두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 할 때 청중도 선택한다.
그는 청중을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단기를 내린다. 문체의 보다 정교한 법칙은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나의 경우는 무지에 의해서든 나의 쾌활한 기질에 의해서든 그대들에게 이해되는 것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
적어도 갑작스럽게 얻을 수밖에 없는 특별히 수줍어하거나 민감한 진리, 불시에 붙잡거나 놓아줘야 하는 진리가 있다. 나의 간결한 문체는 다른 가치도 지니고 있다. 내가 몰두하는 그런 문제 내에서 나는 보다 간결하게 들리도록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하는 자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하나의 새로운 진리를 보았다.

한 줄기 빛이 나에게 떠올랐어. 나에겐 가고자 하는 곳으로,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하는 죽은 길벗,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길벗이 필요해. 스스로 방향을 틀며,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따라오는 살아있는 길벗이 필요해…… 선하고 의로운 자들을 보라!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 석판을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를 가장 미워하지, 하지만 이 자는 창조하는 자이다……창조한 자가 찾는 것은 길벗이지, 시체나 가죽 무리나 신자들이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함께 창조하는 자들을, 새로운 석판에 새로운 가치를 적을 자들을 찾는다…… 창조하는 자는 자신의 낫을 갈 줄 아는 길벗들을 찾는다. 이 들은 선과 악을 파괴하는 자이자, 경멸하는 자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수확하고, 축제를 벌이는 자들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나의 목표를 향해 가련다. 나는 머뭇거리고 게으른 자들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나는 모든 글 중에서 자신의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
누구나 읽는 것을 배우게 되면 결국에는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마저 썩고 말 것이다.
한때 정신은 신이었고, 그다음에는 인간이 되었다가, 이젠 천민으로 된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잠언은 봉우리가 되어야 한다.
희박하고 순수한 공기, 임박한 위험, 흥겨운 심술궂음으로 가득 찬 정신, 이런 것들이 서로 잘 어울린다.
지혜은 우리에게 개의치 말고 조롱하고, 난폭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 즉 지혜는 여인이라서 언제나 용사를 사랑한다.
우리 모두는 모두 짐을 지고 가는 귀여운 나귀들이 아닌가?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만 떨어져도 파르르 떠는 장미 꽃봉오리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삶에 호의적인 내가 보기에도 나비와 비눗방울이,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것 같다. 이러한 가볍고 어리석고 우아하고 활동적인 조그만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유혹되어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게 된다.

사람들은 분노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우리 중력의 영(제도와 관습, 법규와 도덕)을 죽이도록 하자꾸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나는 걷는 법을 배웠고, 그런 이후로 자신을 내달리게 한다. 나는 날아다니는 법을 배웠고, 그런 이후로 누구에게 떠밀리자 않아도 솔선해서 움직이게 되었다. 이제 나는 가벼워서, 이제 날아다니고, 이제 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이제 어떤 신이 나로 인해 춤을 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고귀한 영혼
고귀한 영혼은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낙원이란
“인식의 나무가 자라는 곳이 항상 낙원이다.”태고의 뱀도 가장 최근의 뱀도 그렇게 말한다.

-깊이 있는 사상가
깊이 있는 사상가는 모두 오해받는 것보다 이해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오해받는 것에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허영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되는 것에 괴로워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공감이다. “ 아, 그대 들은 왜 나처럼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려고 하는가?”

-독일 정신의 두 천재
영국인은 철학적 종족이 아니다. 베이컨은 철학적 정신 일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고, 홉스, 흄, 로크는 한 세기 이상이나 ‘철학자’라는 개념을 욕보이고 그 가치를 떨어뜨린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흄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자신을 드높였다.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괴테와 함께) 영국의 기계론적 세계 우매화와 투쟁하면서 일치단결했다.

-성서
성서는 지금까지 나온 가장 훌륭한 독일 서적이었다. 루터의 성서에 비하면 다른 모든 책은 거의 문헌에 불과하다.

-두 종류의 천재
천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낳게 하고 낳게 만들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수태해서 낳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민족 중에는 임신이라는 여성의 문제와 형성, 성숙, 완성이라는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은 민족이 있다. 그리스인은 이런 종류의 민족이고 프랑스인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처럼 수태시켜야 하며 삶의 새로운 질서의 원인이 되는 민족도 있다.

 <도덕의 계보학>

-쇼펜하우어와 음악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다른 모든 예술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독립적인 예술 그 자체이며, 다른 예술처럼 현상의 모습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 자체의 언어를 직접 심연에서 끄집어내어, 그것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본원적인 계시로서 말하는 것이다.
음악가는 신탁을 전하는 사자, 사제, 아니 사제 이상의 존재, 사물들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대변자, 저편 세계의 전화기가 되었다.

-현대 서적의 고유한 특질
현대의 영혼이나 현대의 서적의 가장 고유한 특질을 이루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도덕적인 거짓 속에 아로새겨진 순진무구함이다.
현대의 서적은 ~ 구토제로 쓰일 것이다. 그 이유는 도덕적인 달콤함과 허위, 곧잘 ‘이상주의’로 불리고 어쨌든 이상주의를 믿는 가장 내면화된 여성주의 때문이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나는 신약성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취향이 유별나다는 사실에 나는 거의 불안하기까지 하다(2000년간의 취향이 나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나의 악취미를 지킬 용기가 있다.

구약성서에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라! 그 속에서 나는 위대한 인간들, 영웅적 광경, 지상에서 가장 드물게 보는 어떤 것, 강한 마음의 비길 데 없는 소박함을 발견한다. 더구나 그 속에서 나는 한 민족을 발견한다. 반면에 신약성서에는 오직 사소한 종파적인 야단법석, 오직 영혼의 로코코 풍, 오직 현란하고 모나며 이상한 것, 오직 비밀 집회의 공기만 발견한다. 

<이 사람을 보라>

 -나의 문체기법
어떤 상태를, 기호의 속도를 포함하여 기호를 통한 파토스의 내적 긴장을 전달하는 것이 모든 문체의 의미다. 나의 경우 내적 상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게는 문체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다룬 것 중 가장 다양한 문체 기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적인 상태를 실제로 전달하고, 기호와 기호의 속도, 몸짓-복합문의 모든 법칙은 몸짓의 기법이다-을 제대로 처리하는 문체는 모두 훌륭하다. 나의 본능은 이런 경우 실수하는 법이 없다.

훌륭한 문체 그 자체는 가령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물 자체’, 처럼 순수한 어리석음이자, 단순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 문체는 여전히 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문체는 동일한 파토스를 지닐 능력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위대한 리듬 기법, 복합문의 위대한 문체가 숭고하고도 초인간적인 인간의 열정의 엄청난 상승과 하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나에 의해 비로소 발견되었다.

-작가로서의 나의 특권
몇몇 개별적 경우에서는 내 작품에 익숙해짐으로써 취향을 완전히 ‘망쳐 버린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다른 작품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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