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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탁월함을 위한 도구_책과 글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

by 문정엽/드러커연구가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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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탁월한 삶인가

 


리처드 테일러 (Richard Taylor), 홍선영 역, 마디, 2014
Restoring Pride (1996)
 

탁월함을 설명하는 간명하고 깊이있는 탐구  

탁월함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 인간으로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에는 가치가 있다. 탁월함은 진정한 자부심의 근원으로서, 외부에서 이를 인정하는 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진정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실제는 능력과 성취로 보면 탁월함과 평범함, 비천함이 분명히 있다. 자신에게 잠재된 탁월함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작품이 되고, 스스로를 재창조하게 된다. 

2019. 12. 27 1차 독서/2023년 5.20 2차 독서


무엇을 얘기하는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무엇이 더 우월한 사람을 만드는 지를 인식해야 한다. 
진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 주어진 자연적 사실과 인간이 만들어 낸 관습적 사실이 있다. 관습적 사실이 불변의 진리로 취급될 때 폐해가 시작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관습은 관습대로 바라보고 스스로 구현한 삶의 원칙을 더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삶의 목적으로서 탁월함은 가치가 있다.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관점으로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인간일 수 없으며,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평등주의 주장과 엘리트주의가 있다:
권리의 평등을 인간의 평등과 혼동하는데 이 두 가지는 다른 개념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가진 재능과 능력의 가치는 제각기 다르다.
-인간의 권리는 평등하다는 확신은 가치의 평등에 대한 그 어떤 주장도 근간으로 삼지 않는다. 인간의 가치가 모두 평등한지 아닌지는 인권의 평등과는 상관이 없다. 물론 법과 공공정책에 의해 모든 인간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즉, 인간은 사실이 그렇든 아니든 간에 동등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대우받아야 한다. 

자부심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정당한 자기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즉 실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것이 자부심이며, 평범한 사람이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 자부심은 근거 없는 망상일 뿐이다. 멍청한 사람이 자신의 멍청함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듯이 취향과 교양이 저속한 사람 또한 자신의 저속함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는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자부심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업적과 성취에 대한,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보내는 인정이자 사랑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하는가를 의식한다면 이것은 타인의 인정에 자기 존재의 가치를 결부시키는 의식이다. 타인의 인정은 자부심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발견한 것

저자는 자부심은 탁월한 성취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개인적 자아에 대한 자부심의 부여는 진실하지 않다고 본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성취에 대한 솔직한 인식을 자부심으로 이해한다. 자부심은 자아존중감과는 다르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주관적 인정이 자아존중감이라면 자부심은 스스로가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자신이 이루었다는 객관적 실현에 대한 인식이다. 다만, 객관적 성취에 대한 인정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부심은 훨씬 더 엄정하고 무겁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자부심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 동의한다. 저자는 이런 자부심의 실제를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으로부터 끌어 오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윤리로서의 도덕이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도덕으로 이해했고, 이를 아르테(arte)로 표현했다. 아르테는 탁월함이라는 뜻으로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드러내고 충분히 실현하는 것이다. 

탁월함을 위해 살라, 자신에게 있는 탁월함을 인식하고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을 실현하라. 탁월함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약하거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뿌듯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는 거짓 자아이고 자기기만이다. 사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부분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봄으로써 삶을 정직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알고 싶은 것

삶의 목적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삶, 그 근거로서 자신이 원하는 탁월한 성취를 추구하는 삶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 물론 삶에 대한 의식은 법칙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삶의 방식에 대한 의식적인 선택만큼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 방랑하는 삶도 일종의 선택이다. 즉, 삶의 방식은 인간이 살아가는 한에는 반드시 선택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욱 좋은 삶을 만드는 방식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이롭다. 자부심을 느끼는 삶은 깊게 성찰해 볼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진정한 개인주의-각자가 각자의 주인으로 사는 삶-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오도된 개인주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라는 말로 탁월함과 평범함, 좋은 삶과 불행한 삶에 대한 가치부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이는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것이다. 보다 행복한 삶, 보다 좋은 삶에 대한 의식은 유일한 정답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향상된 삶을 이끄는 중요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고민.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화를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이, 자주, 깊게 할 수 있을까?    

탁월함을 향한 삶을 살겠다는 노력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그 실현 여부와 정도는 개인적 조건(능력, 선택 등)과 함께 사회적 조건(교육, 지원, 기회 부여 등) 에도 어느 정도 구속된다. 저자는 타인의 인정여부와 자부심은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타인의 인정이 자부심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인정을 통해 개인이 이룬 성취의 의미와 영향을 확인하고, 더욱 큰 노력을 하겠다는 동기를 준다. 또한 사회는 결코 무인도가 아니며 인간은 무인도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탁월한 성취가 실현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보다는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이롭다. 

인간 역사에는 불행한 천재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 능력보다는 신분과 계급이 허용하는 대로 달리 살아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삶의 조건은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받드는 현시대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탁월한 성취를 장려하고 용기를 주며 북돋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강화하는 것이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저마다의 꿈과 목표를 가진 개인으로서 자신의 탁월성을 발휘하도록 돕고 그 탁월함을 실현하도록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어떤 것일까? 분명히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 진보해 왔지만, 이런 진보를 더욱 가속하고 모든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일까?     


<인용문 모음> 

우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남보다 더 현명하고 창조적이며 지략이 뛰어나고, 세상에 중요한 일부 또는 많은 면면에서 더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자부심이란

선한 사람(the good), 즉 지략 있고 창조적인 인간으로서 두드러지는 사람은 자부심(pride)을 느낄 자격이 있다. 자신에 대한 정당한 사랑이 자부심이다.
바보는 물론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뿐이다.
자기애를 정당화하는 것은 개인적 탁월성, 즉 그 사람을 남들과 구별할 수 있는 실제 업적이다.
남들이 간 길을 그저 따라가는 삶은 편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언가를 잘해나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며, 그런 삶만이 자기애, 즉 자부심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우월함

여기서 우월함이란 단순히 이런저런 종교나 이데올로기, 집단의 지지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우월함을 말한다-우월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뚜렷한 개념을 갖고 스스로 그러한 인간이 되어라.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당신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에 따른 대가는 명예나 부, 영광이 아리라 내면의 영광과 풍요로움이다.

진정한 자부심과 거짓 자부심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군림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잘못에 대한 남의 지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남의 평가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말투가 부드러운 데다 남의 관심을 얻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자부심이 다른 모든 덕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문화가 그리스의 유산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자부심이라는 개념도 타락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 설명했다. 그들에게 자부심이란 개인의 특별한 가치와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자부심이 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진심으로, 분명히 믿으며, 그 믿음이 옳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부심은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자신에게 평범하지 않은 어떤 덕목이나 뛰어난 면모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전부가 아닌) 일부 사람들의 믿음, 즉 진실한 믿음이 바로 진정한 자부심이다.
자부심이란 군중 속에서 두드러지는 개인의 강점이나 탁월성-고대의 의미로 보자면 덕-을 바탕으로 한 자기애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자만, 못생기거나 매력 없는 여인에게 자부심을 느끼라고 권하는 것은 자부심의 의미를 왜곡하는 셈이 된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라고 권고해서는 안 된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가장 고귀한 인간이 가장 비천한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실이다.

자부심과 인정

진정한 자부심을 느끼려면 위대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강점과 덕은 대체로 존경을 받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때로 그 사람만의 독특한 가치가 남들 눈에 전혀 띄지 않을 수도 있다.(중략) 무수한 영웅들, 위대한 예술가들이 이름 없이 사라진다. 모든 심오한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아니며 천재적인 인물이 위대한 사상의 결실을 맺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요절하기도 한다.
어떤 행동의 아름다움은 그 행동의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특성에 있으며 아름다움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략) 작품을 남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도 창작자의 위대함은 사그라지지 않듯이, 작품의 빛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철학자는 자기 사상을 심오하고 진실하게 펼치는 철학자 못지않게 위대하다.
반 고흐의 작품은 현재 수 백만 달러를 호가하지만, 작자 생전에는 단 한 점만이 45달러에 팔렸다.

인간 자질에 대한 이해

기독교에서 인간의 좋은 자질은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닌 그가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산상수훈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개인적 가치와 탁월성은 그 반대되는 자질에 밀려 묵살되었다.(중략) 그리스인들에게 누군가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 그가 우월하다는 뜻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 식견, 창조력이 우월하다는 말이었다.
누구나 특별히 잘하는 분야가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다수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아예 없다.(중략) 누구나,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어떤 분야에 유난히 뛰어나다고, 아니면 우리 모두 이런저런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려 명의 베토벤, 여러 명의 피카소, 여려 명의 셰익스피어 , 여러 명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우월한 존재일 것이고, 다른 인간보다 더 나은 본보기일 것이다.(중략) 왜냐하면 어떤 재능이나 능력은 다른 재능이나 능력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새총챔피언 vs. 베토벤의 비교: 베토벤은 문화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자랑이며,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위인이라 부를 것이다.

삶의 태도- 자신을 위한 삶-자기만의 삶을 창조하기-예술이 되는 삶-삶의 재창조

무언가를 아주 잘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려 펼치는 사람- 가령 음악가나 작가, 아니면 원예나 자녀 양육 등 조금 더 평범한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 혹은 무엇이 됐든 위축되지 않는 창조력으로 능력을 펼치는 사람-을 만난다면, 일말의 수치심을 느끼고 당신의 가치가 그 사람만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무언가를 하라. 본디 그것이 당신 인생의 주된 과업이 되어야 한다(p.67).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부와 권력, 지위에 대한 열망을 만족시키려는 저돌적인 충동으로 남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과 같지 않다. 사실 이런 사람은 부와 권력, 지위를 위해 사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자신 안의 좋은 점을 위해, 그것을 더욱 키우기 위해 힘과 기운과 생각을 모두 쏟는 삶이다. 개인적 탁월성과 고귀함을 추구하는 삶이다.
고귀함은 과연 무엇인가? 고귀함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자신의 가장 좋은 것, 자신을 지구 상의 다른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어리석고 천박하며 사소한 일에 연연하고 나쁜 의미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돋보이게 하는 당신 자신의 것을 생각해 보라.
애써 평범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되거나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해 쓸모없는 존재가 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생각과 이성, 창조력으로 이룬 것은 세상을 눈부시게 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지 못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가치 있는 그 무언가를 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식물의 신품종을 개발한 원예가, 근면함과 비전으로 야생물 보호구역을 만든 동식물 연구가
창조적 목표와 별개로,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과 상상력, 지성과 용기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중략) 기억하라. 당신의 가혹한 심판관은 당신 자신이다.(중략) 당신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다.
자신의 가치를 남에서 얻을 필요는 없다. 세상의 요구를 그저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거나 원숭이처럼 남을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유일한 칭찬은 스스로 건네는 칭찬이다. 당신의 삶이고, 그 삶의 심판관도 당신 자신이다.
어떤 시점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이 삶이, 즉 당신이 살아온 방식과 이룬 업적이 모두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 진심으로 선언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다. 그때에는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든 꾸려온 당신의 삶이 남들이 주입한 삶의 방식에 반응한 결과라면, 그것은 결코 당신의 삶이 아니며 자부심의 근거가 될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정확히는 자발적 노예지만 어쨌든 노예다.
당신은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발명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 무엇이든 원한다고 다 이루지는 못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면 노력해서 찾을 수도 있다. 당신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개인적 탁월성은 분명 존재한다.(중략) 핵심은 남에게 중요하든 말든 당신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이루고 나면 오랫동안 깊은 만족을 느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당신은 인생이 황혼 녘에 이르렀을 때 다른 누가 알아주든 말든 스스로 그것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중략) 당신은 자신의 삶을 축적한 시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시간을 어떻게 장식했는지 따져보면서 어느 누구보다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자기 창조의 또 다른 면은 어느 때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은 단 한 번 발명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다시 발명할 수 있다.(중략)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스스로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루고 나니 공허한 느낌만 들기도 한다. 그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외적인 것이라 불리는 삶을 둘러싼 환경의 가능한 모든 변화 속에서 당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 세상 속 자신의 위치나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들여다 보라. 눈앞에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이 만족스러운가? 자부심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인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치를 취하라. 스스로를 참고 견디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고픈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단순한 인내는 누구나 열망할 가치가 있는 덕목이라 생각하고픈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인간의 뛰어난 특성인 창조성은 다른 어떤 생명체에서도 볼 수 없다. 그 정당성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에게만 입증하면 된다.
남들의 가치관에 기대어 답을 결정 내리지 말라. 남들에게 더는 인정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당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바보처럼 비칠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에게 중요한 유일한 심판관은 당신 자신뿐이다. 단, 이 심판관이 까다로워야 한다는 점은 확실하게 해 두자.(중략) 그는 개인으로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개인으로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자신만의 창조력으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에만 관심을 둔다.
인간은 역사 있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다르다.(중략) 우리의 목적은 그저 종을 존속시키는 것이, 똑같은 세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중 누군가는 삶을 통해, 삶의 목표와 업적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 낸다. 다른 말로 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창조적이며, 적어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의 상상과 노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진다.

우월함과 과시

우월한 것과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진정으로 자부심 넘치는 사람이라면 변변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어떤 사람이 노예인지 알고 싶다면 그가 팔렸는지, 부모가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신 그가 마음속으로, 진심을 담아 '주인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면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라 해도'. 즉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라 해도 그를 노예라 부르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발적 노예'라는 것이다.
노예란 자신만의 목표를 세워 자신만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남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추상적인 소유의 개념이 아닌 바로 이것이 노예제의 핵심이다.
오만은 자부심이 아닌 근본적 불안의 표현이다. 진정한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오만한 경향이 있다. 오만은 힘이 있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나.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할 필요를 못 느낄뿐더러 이를 다른 누구에게 증명해야 할 필요 역시 느끼지 못한다.

자부심과 솔직함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부심의 아름다움이자 위안이다. 저울질하고 방어할 필요 없이 말이 편안하고 일관되게 흘러가도록, 부끄러울 일 전혀 없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남을 속이는 게 자부심을 잃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자신의 내적 가치가 위대하지 않음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개인적 탁월성이 아닌 다른 무엇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만이, 기만의 가면을 쓰고 짐짓 가장하며, 자신의 실체를 덮고 조금 더 용인 가능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실제 자신과 겉으로 보이는 자신을 구별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들에게 이 두 모습은 하나다.  

자부심과 예의

자기 자신은 물론 남들의 욕구를 깊이 이해하는 생각이 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진정 세련된 예의를 갖추기 힘들다.
세련된 예의는 단 하나의 규범만을 기반으로 한다. '신중하라'. 단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규범을 적용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실제로 이런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형식적인 행동은 예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신호다.
사람들은 최대한 에둘러 자기 얘기만을,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만 건넬 뿐이다. 상대를 향한 그들의 관심은 간접적이다.
자부심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와 관련이 있다면 예의는 남을 어떻게 보고 대하는지와 관련 있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 있든 자신감이 넘치고 여유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중략) 가치가 충만한 사람은 남의 관심을 끌어 모을 필요가 없으니 여유가 있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이런 지고한 무심함과 여유를 보이면서 그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완벽한 예의를 갖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남들의 욕구와 감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의를 갖추는 첫걸음이다.
신중함이라는 규범은 자부심과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유용한 예의 규범이다. 이 규범은 친구나 친척, 낯선 사람 등 다른 모든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당신을 정확한 방향으로 이끈다. 또 이 규범이 자부심과 어울리는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자부심 높은 사람들을 구분 짓는 정당한 자기애와 일맥상통할 뿐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규칙은 이렇다. 크든 작든, 고의든 아니든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고, 그저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상대의 짜증이, 또는 실질적인 상처가 분노로 곪아 터지든 말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미안합니다"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이며, 무엇보다 당신 자신의 품위와 정당한 자기애를 뚜렷이 증명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남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 하지 말고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들이고픈 어떤 충동도 제지하며, 말을 하기보다 듣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말고 상대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라. 당신의 자녀에 대해 말하지 말고 역시 상대의 자녀에 대해 물어라. 상대가 자기중심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면 적당한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말을 지나치게 몰두해서 듣는다 싶으면 더욱더 침묵하라.

행복에 관하여

개인적 탁월성과 예의, 행복이라는 세 가지 이상은 서로 뒤얽혀 있다. 특히 개인적 탁월성과 행복은 나머지 둘과 따로 떼어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은 일종의 성취감이기 때문에 개인적 탁월성이 없으면 행복할 수도 없다. 예의와 간단한 규범은 자부심과 성취감으로 가득한 삶을 꾸려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금고를 채우는 대신 플라톤이 말한 영혼의 보물을 키웠다. (중략) 자신이 가진 유일하게 소중한 것, 바로 자기 자신을 고양하는데 귀중한 하루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똑같은 요점을 강조할 수 있다. 소유하고 싶은 무언가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되고 싶은 삶의 모습을 이상으로 삼는 것, 이것이 주어진 시간을 유리하게 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사실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중략)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이 보다 더 중요한 고민거리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앞에 멈춰서는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남에 대한 무관심을 고수하면서 무작정 밀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는 것, 개인적 탁월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생의 첫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제는 달갑지 않은 자기 평가를 마주하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남은 인생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야 할 시간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한다고 늘 가르침 받았던 무거운 고민거리는 제쳐두고 이제 당신 자신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그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자신뿐이다. 여기에 생각을 집중하고 노력을 쏟지 않으면 결코 바라던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시계처럼 태엽이 감겼다가 서서히 풀리면 이내 멈추고 다음 날이 되어 다시 감겨 돌아가는 삶.
우리의 주된 의무는 언제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우리는 막중한 책임을 진다. 누구도 당신 대신 그 책임을 짊어질 수는 없다. 당신은 남을 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부터 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열정과 욕구에 몰두하라는 뜻이 아니다. 물건을 축적하는 데 자신의 귀중한 강점과 힘과 시간을 쏟아부으라는 뜻도 아니다. 스스로를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뜻이다. 또 자신을 독특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능력, 즉 자신 안의 독창적 재능을 키운다는 뜻이다. 당신의 좋은 자질, 또는 위대함은 당신 속에 있다. 그것이 당신을 명성이나 영광보다 훨씬 더 귀중한 무언가, 즉 행복이나 만족으로 이끌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혹은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이란 당신 스스로 창조해야 할 무엇이다. 쉽지 않은 일이고,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가치 있는 일이며, 결국 우리가 고군분투하여 이룰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좋은 악령 또는 혼령에 홀린 상태, 당사자가 엄청난 행운을 누린다는 의미.
고대 도덕철학자들은 어떤 인간도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솔론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10장). (중략) 여기서 요점은 행복 추구가 인간의 평생 과업이며, 행복은 단 한순간,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아이나 천치로서, 또는 능력이 제한된 어떤 개인으로서가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이루는 성취다. 행복은 기쁨과 같지 않다. 기쁨은 행복을 이루는 한 요소.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에게 기쁨을 부여할 수 없다. 기쁨은 근원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어야 한다. 기쁨은 운의 문제다. 기쁨은 아주 행복한 삶에 속하지만 행복한 삶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행복은 그 사람 자신에 근간을 둔다. 외적인 좋음은 좋음일 뿐이며, 행복한 삶에 이것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외적인 좋음의 어마어마한 합이 그대로 행복한 삶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 탁월성에 대한, 초인적인 노력과 지략을 동원하여 그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게 만드는 근원에 대한 보상은, 다만 탁월성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대단한 음악 작품이나 시, 이야기, 철학 논문이나 그림, 건물을 창조하는 능력, 혹은 천재성이나 모법적인 용기로 위대한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 등은 남들이 건넨 선물로는 제대로 꾸며지지 않는, 그 자체가 선물이다. 사람이 만족을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속한 자질 때문이지 덧대어진 사물 때문이 아니다.
행복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다. 행복은 매우 희귀하며 오랜 시간에 걸친 선택과 노력의 산물이다.
건강이라는 개념은 기능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행복이란 온전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덕에 대해 동일한 정의(고대 도덕철학자의 관점) 덕과 행복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행복을 성취라 생각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을 포함해야 하며, 자아실현은 창조력의 발휘를 의미한다.
성취=기능: 몸과 마음은 함께 창조적 활동을 성취한다. 대체물은 없다.  건강하지 않은 채 건강의 표지만 있을 수도 있다. 행복한 모습과 행복한 감정은 행복이라는 상태의 표지가 되기도 하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 행복이 무엇 인지 몰라 진정한 행복과 그럴듯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한다. 행복 추구에 필요한 창조적 지능이 부족한 경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들에게는 흐르는 시간의 산물일 뿐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역사가 없다.(중략) 이 참새는 저 참새와 다르지 않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그대로 반복하면서 생각과 감정에 큰 변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런 사람들도 주변에 만연한 평범한 기준에 따라 매우 행복하다는 것이다.(중략) 이런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그저 행복한 감정일 뿐이다.(중략) 이들은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족하는 것이다.

덕과 행복(고대그리스철학의 입장)

인간 본성의 지적인 면이 인간의 특징이다. 지성의 발휘가 인간의 제대로 된 기능이며 여기서 드러나는 탁월성이야 말로 인간의 특별한 덕이다. 인간 본성=이성이란 단순히 행동을 통제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등의 지성을 발휘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성의 활동뿐만 아니라 관찰과 사고, 그리고 창조적 행동을 포함한다. 인간은 생각하고 반성하며 창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지식의 추구가 인간의 탁월한 덕. 지식 추구는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단순히 흡수하는 수동적 활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 지적 활동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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